「奉局長」的三分錢專欄時間! 局長的文筆水準或許不值「三分錢」…但還是解開主日話語後採用世上的語言撰寫成專文囉。
필자는 국내 몇 곳 없는 천도교(天道敎) 재단의 학교를 다녔습니다.
3년간 한 주도 빠짐 없이 진행 되었던 종학(宗學) 시간을 통해 배운 천도교의 교리는 기독교 지식밖에 없던 제게는 생소하면서도 매우 놀랍게 다가왔던 기억입니다.
‘사람’이란 것이 본래 하늘을 모시고 나온 것이니(侍天主) 내가 곧 하늘이요(人乃天) 이와 같이 다른 사람들 또한 모두 하늘이니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아끼는 것(敬天愛人)이야말로 참 된 도(道)라는 내용이 핵심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비교종교학을 전공한 한 분이 ‘표층’종교와 ‘심층’종교를 구분하는 내용으로 강의 하는 것을 최근에 들을 수 있었습니다.
현실의 내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집중하면 표층종교이고 현실의 나를 버리고 참 된 나를 찾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심층종교.
이와 같이 무조건의 믿음을 강조하느냐 스스로의 깨달음을 강조하느냐,
신과 사람, 성과 속이 엄격히 분리되었는지 상호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경전의 ‘문자(儀文)’를 중심하는지 문자를 넘어 선 그 이면의 ‘뜻’(不立文字)을 중심하는지 등으로 표층과 심층으로 양분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공포에서 기복(祈福)으로... 다양한 형태의 원시 종교로부터 근래의 신인합일(神人合一)에 이르기까지 종교 그 자체도 인류의 이성이 발전하는 것과 궤를 같이하며 어떤 분야 못지않게 매우 세련 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것은 틀림 없어 뵈지만 오히려 그러할수록 종교의 기능은 쇠퇴해 가고 심지어 종교의 종말을 고하는 사람들이 늘어 나는 지경에까지 다다른 것은 과연 어떤 이유 때문일까요?
이러한 ‘종교’의 발달은 인간의 지위를 한껏 고양하고 인간 고유의 자존감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 했을 수는 있겠지만 ‘인본주의’라는 또 다른 한계 상황에 그대로 노출 된 면도 분명해 보입니다.
어떤 심층 종교, 어떤 종교와 관련 된 학문이라 할지라도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시각에서 신을 다루고 인간의 관점에서 신과 인간의 관계를 정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지구의 입장에서 태양이 돌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정명석 목사께서 해외 선교 중 있었던 일화입니다. 택시로 이동 중 기사가 차 안 쓰레기를 밖으로 내 던지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통역을 통해 ‘기사님은 세상에서 가장 큰 쓰레기통을 가지고 계시군요’ 라고 은근히 꾸지람을 하셨다고 합니다. 당황해하는 기사로부터 ‘죄송하다’는 사과를 즉시 받아 내었다고 합니다. 차 안의 사람들 시각에서는 차 안 쓰레기를 밖으로 버린 것인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차를 타고 가던 사람이 하나님의 지으신 이 지구 세상으로 쓰레기를 버린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선교회 회원 모두가 알고 있듯이 정명석 목사께서는 해외 선교 도중에도 어느 곳을 가든 지저분한 곳이 눈에 띄면 바로 청소를 합니다.
이는 해외에서 관광 온 외국인이 우리 집 앞을 청소 해 주듯 그리 일반적인 상황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선교회의 자연성전 관리 활동 중에 누구의 소유인지 따지지 않고 인근 산과 들에도 관리가 필요한 부분이 보이면 정성껏 관리를 합니다.
凡人(범인)들의 시각으로 굳이 남의 나라에까지 가서...
이 곳은 우리 소유의 땅도 아닌데... 할 수 있겠지만
목사님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 세상은 모두 다 하나님의 정원이라는 생각을 잊지 않습니다.
이런 간단한 삶 속의 일화 뿐 아니라 선교회의 교리에서도 시각, 관점이 분명 다름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시각에서 ‘공중(空中)’은 분명히 구름 위 ‘하늘’인지 모르겠지만 신의 관점에서 보면 ‘지구, 이 땅’이야 말로 분명히 우주의 한 ‘공중’에 매 달려 있다는 사실.
공중 재림을 이 땅에 육신을 쓰고 나타남으로 해석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인간의 시각이 아닌 신의 관점에서 바라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종교에 대한 시각, 정의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겠지만...)다시 ‘종교’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면 우선 인간의 시각에서 바라 보는 종교는 인간으로서 신과 같은 존재로 자신들의 존엄성을 높이고(人乃天) 상호 그런 사람들끼리 존중하며 잘 사는 것(敬天愛人)에 비중을 두고 접근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인데...
그렇다면 신의 관점, 창조주의 입장에서 ‘종교’를 생각해 본다면 이는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요?
모름지기 신의 창조목적을 이룸에 관한 것이 아닐까 생각 해 봅니다.
목사님께서는 ‘사랑의 원(元)존재자 이신 하나님은 사랑의 창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인간의 육과 영과 대화하고 돕고 함께 하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의 관점에서 ‘종교’를 정의한 아주 훌륭한 문장 중 하나일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천지만물도 그 창조하신 목적을 이루며 쓰여 질 때 가장 가치가 있는 것이며 인생들 역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어 사는 삶을 살 때 최고 가치 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뤄드리는 인생은 정말 가치 있는 인생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살게 된다면 나머지 인생들의 모든 문제들은 하나님께서 해결 해 주실 것입니다.
이런 목사님의 말씀으로 신의 관점에서 종교를 다시 생각 해 볼 수 있게 된다면 종교는 ‘종말’을 맞는 것이 아니고 ‘완성’ 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