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잼 칼럼 by 갓잼

갓잼과 함께 생각해보는 진리와 사랑의 life

칼럼_연재칼럼_갓잼 칼럼

판결이 진실일까? — 인간이 만든 ‘재판 제도’에 대한 생각

재판정1.jpg



※ 이 글은 ‘선생님의 재판’ 그 자체만 가지고 문제점을 지적하며 답도 없이 막연하게 분노의 출구를 찾기 위함은 아닙니다. ‘재판’이라는 제도 전반을 되짚어보고 우리가 어떤 자세로 이 상황을 마주해야 할지를 함께 고민하기 위한 글입니다.


우리는 흔히 재판을 정의(正義)의 마지막 보루로 생각하곤 합니다. 어떤 억울한 일이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법정이 진실을 밝혀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법대로 하자.”는 말 속에는 ‘공정하게 처리하자’는 뜻이 담겨 있고, 그 말 한마디는 최소한 이 사회가 ‘정의’를 추구하고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합니다.


그런데 과연 ‘재판’이라는 게 정말 그렇게 믿을 만큼 정교하고 완전한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습니다. 재판 역시 결국 사람이 만드는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법을 만들고, 사람이 해석하고, 사람이 판결을 내립니다. 그렇기에 그 과정에는 감정, 실수, 편견, 그리고 인간의 한계가 고스란히 반영될 수밖에 없습니다.


농담처럼 들릴지 몰라도 “아침에 아내와 싸우고 온 판사의 그날 재판은 형량이 더 높아진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물론 실제로 그렇다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에는 재판이 완전히 냉철한 논리와 법리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이나 외부 상황이 개입될 수 있다는 불편한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오죽하면 재판에도 빨리 인공지능(AI)을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올까요?


특히 우리처럼 사회의 큰 관심을 받는 사건일수록 이러한 한계는 더욱 분명히 드러납니다. 사건의 ‘본질’보다 부정적 이미지나 여론이 앞서 버리면, 피고인은 이미 ‘나쁜 사람’으로 낙인찍혀 버리고 법정에 서기도 전에 세상으로부터 이미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이나 다름없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공정한 재판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재판부마저도 이러한 사회적 여론과 분위기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사건이 커져 버리면, 재판부는 ‘법대로’가 아니라 사회가 ‘원하는 방향’으로 판결을 내리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판사 스스로 여론의 화살을 맞는 대상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재판의 불완전함은 과거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고대 아테네에서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시민들의 오해와 불신 속에서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는 끝까지 순응하고 독배를 마시며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했지만, 그 누구도 그 재판이 진정 정의로웠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 *참고로,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실제로는 더 복잡한 철학적 맥락이 있으나 후대에 간명하게 요약된 표현이라는 해석이 유력합니다.


그리고 2,000년 전, 예수님의 재판에서도 똑같은 모습이 나타납니다. 당시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의 압박에 밀려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넘겨주게 됩니다. 겉으로는 재판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법이라는 외형 아래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심, 대중의 선동, 총독의 책임 회피가 결합된, 본질적으로 진실을 외면한 ‘불의한 판결’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에도 우리는 그런 ‘빌라도의 재판’을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여론이 진실보다 앞서고, 언론의 보도가 공의로운 판단보다 강하며, 재판이 정의보다는 무난함을 택할 때, 우리는 다시금 좌절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진실은 잠시 묻힐 수는 있어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잘못된 재판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바로잡혀야 하고, 결국은 바로잡힌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 자체로는 불의였지만, 그것을 지켜본 수많은 이들이 ‘이건 잘못됐다’고 느꼈고, 그 마음들이 모여 역사의 흐름을 바꾸었습니다.


억울한 옥살이를 수십 년간 견딘 뒤에야 무죄를 선고받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분들에게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과 고통이 너무도 크지만, 그 재심 판결은 단지 한 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정의는 더딜 수 있지만, 결코 포기되지는 않는다.”는 메시지 말입니다.


이 믿음은 단순한 낙관이 아닙니다. 우리가 섭리길을 걸으면서 절대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신념입니다. 정의는 더디게 오기도 하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돌아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돌아옵니다.


이 세상의 재판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재판을 맹신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체념하거나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진실과 진리와 진심’은 결코 침묵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인내심을 갖고 기다릴 뿐입니다.


재판은 정의를 자동으로 실현해 주는 시스템이 아니라, 정의를 향한 인간의 고된 시도입니다. 그 시도를 멈추지 않는 한, 진실은 언젠가 우리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end)



내가 해 아래서 또 보건대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를 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도다.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목적과 모든 일이 이룰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 전도서 3장 16절~18절




아브라함, 요셉, 모세, 다윗, 예수님같이 하나님이 시대마다 세운 선지자, 중심인물, 구원자 등 시대 죄를 담당해야 할 자는 아무리 책임을 다했어도 죄인들 대신 정한 기간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그 대표가 대신 고통을 받음으로 인해 시대와 따르는 자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구원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 시대도 그러합니다. 변론을 잘해 줘도, 책임을 다했어도 시대 죄를 담당해야 합니다. 표상자로 세움 받은 자가 시대 전체를 두고 회개하고 시대 사람들이 받아야 할 시대 죗값을 받아야 합니다. (중략)

내 말은 진실합니다. 지구가 자전 공전하듯 태양이 비추듯 지금도 미래도 내가 전한 하나님 말씀대로 됩니다.

— 2025년 7월 23일 <생명의 말씀> 주제 수요말씀 중



[by 트리뷸러]

조회수
21
좋아요
0
댓글
0
날짜
19: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