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잼과 함께 생각해보는 진리와 사랑의 life
오래전에 어디선가 본 이야기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1800년대 말경 한국 선불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경허(鏡虛) 스님이란 분의 일화입니다. 이 일화는 여러 비슷비슷한 버전이 있는 것 같은데 제가 읽었던 내용은 다음과 같이 기억됩니다.
경허 스님이 제자 만공 스님과 함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냇가에 이르렀는데 마침 한 젊은 처자가 물길을 건너지 못해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경허 스님이 여인을 등에 업고 내를 건넜습니다. 여인은 고맙다는 인사를 깊이 하고 자기 길을 떠났습니다.
만공 스님이 나이 많은 경허 스님에게 화를 내었습니다.
“아니 스님! 불자의 몸으로서 속세를 멀리 해야 하거늘 어찌 여인의 몸에 손을 대었단 말입니까?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경허 스님은 아무런 대꾸 없이 묵묵히 길을 걷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만공 님의 핀잔은 길을 걷는 동안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절에 도착한 후에 경허 스님이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내를 건너자마자 그 여인을 내려놓고 왔건만 그대는 지금까지도 여인을 마음에 품고 왔구려...”
그 사람의 관심은 그 사람의 수준을 보여줍니다.
섭리는 지독한 고통을 겪었지만 하나님의 궁극의 뜻을 알기에 이미 지난 것을 내려놓고 하늘의 뜻을 향해 앞으로 갈 길을 가느라 바쁩니다. 아직도 길을 벗어난 자들의 투정에 행여 제정신이 돌아오려나 하는 기대를 붙잡고 있지는 않습니다.
“JMS가 뒷목을 잡고 쓰러질 정도의 일”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하나님의 역사의 방향이 달라졌다”거나 하는 정도일 뿐인지 섭리 안팎에서 누가 어떤 일을 했으며 무엇을 얻었는지 등은 그저 바람이 지나간 흔적 정도로밖에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섭리와 무관한 그 누가 누구랑 결혼을 했네, 어디서 사네, 하는 이야기들은 그 누구의 마음도 들썩이게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런 소문을 들은 귀를 씻느라 허비할 시간이 아까울 뿐입니다.
섭리는 갈 길이 뚜렷이 있는 곳입니다.
(빌립보서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섭리는 지금까지 수많은 사연과 사건들을 달고 왔습니다. 사건들이 생길 때마다 그 사건은 이전에는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일들로서 큰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사건도 섭리의 존립을 위협하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경험은 섭리인들의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하고 각자 자기 차원을 높이는데 도약대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울러 썩은 환부를 도려내는 수술도 겸해서 말이죠.
“지금은 악인들을 쪼개 내고, 상처를 치료하는 기간이다.” - 2025. 2. 16. 주일말씀 중
이러한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것은 섭리가 오로지 창조주의 작품으로서 그를 닮아가는 것에 관심을 두고 그 뜻을 향해 달려가기 때문에 가능했던, 그리고 지금도 가능한 일입니다.
뜻을 향해 가는 장도(壯途)에는 별일들이 다 생깁니다. 그 깊은 뜻을 상대는 알 도리가 없으니 그저 입을 꾸욱~ 다물고 갖은 모해(謀害)를 다 겪고 가야 할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섭리는 법도(法道)라는 명분 속에 포장하여 여인에 대한 미련을 가슴에 품은 저 젊은 승려와 같이 사욕(私慾)에 묶여있지 않고 주가 주시는 진리의 방향에 맞춰 푯대를 향하여 갈 길을 갈 뿐입니다.
지금까지 그래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갈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갈 길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가는 이 길을 ‘섭리’라고 이름합니다.
by DU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