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奉局長」的三分錢專欄時間! 局長的文筆水準或許不值「三分錢」…但還是解開主日話語後採用世上的語言撰寫成專文囉。
사실상 신약 역사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유럽은 규모가 되는 어느 마을에 가도 ‘성당’과 ‘광장’이 존재함을 볼 수 있습니다.
잘 모르긴 해도 신(神)과의 관계를 위해서는 사람들이 ‘성당’에 모였고, 사람간의 일을 위해서 ‘광장’에 모였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최근 선교회 회원들의 자발적 의사로 정명석 목사의 공정한 재판 촉구를 주장하며 서울시청 등 ‘광장’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그간 ‘성전’에 모이는 것에만 익숙했던 우리에게 ‘광장’에서의 모임은 확실히 생경합니다.
이 익숙하지 않은 배경에서 낯익은 목사님 말씀 동영상이 서울 광장에 울려 퍼지는 장면에서는 참으로 다양한 생각과 감회들이 동시에 뇌리를 스쳐갑니다.
여기는 어디, 우리는 누구?
‘광장’에 서는 것이 또 다른 오해나 비난으로 되돌아 오지는 않을까?
진작에 ‘광장’에서 외쳐야 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반세기를 목전에 둔 선교회의 역사, 그리고 예언의 2023년!
‘역사’는 기대하고 희망하던 바가 마침내 ‘결실’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여서 이뤄왔던 것들의 ‘축적물’이라고 한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행하여 왔었고 어떤 것들을 축적해 왔었던가 생각이 새삼 깊어 집니다.
‘광장’에 선 우리들의 주장은 매우 간단합니다.
분명한 동기가 확인된 특정인, 그리고 그(들)의 기획에 따라 동원되는 황색저널리즘, 흥행이 최고의 목표이자 가치인 콘텐츠 공급자, 이런 프레임과 여론몰이에 흔들리는 사법부...
엄연히 ‘재판 중’인 사안에 대해 이미 단죄하듯 하는 화법을 넘어 오히려 재판의 결과를 미리 정하고 맞추어 들어가려는 것인지 의심이 들 지경의 안타까운 현실.
당사자인 정명석 목사께 가장 피해가 가는 것은 언급할 것도 없고 선교회의 모든 회원과 그 가족에게 가는 2차 피해 역시 심각한 작금의 현실에 우리는 ‘성당’이 아닌 ‘광장’에 모여 서게 된 것입니다.
무죄추정주의는 이미 보이지 않고 이와 함께 형사법의 다른 근간인 증거재판주의 관점에서도 문제점은 여실히 드러나 있습니다.
검사 측이 핵심 증거라고 제출한 음성 녹취파일은 ‘국과수’, ‘대만 과학 범죄 수사 연구소’에서 ‘편집 가능성이 있다’고 판독했는데 지금은 이 파일마저 석연치 않은 수사관의 ‘실수’로 삭제가 되어 버린 상태입니다.
이미 너무나 유사한 전례를 우리는 경험했습니다.
2006년 4월 중국에서 발생한 성폭행 사건
당시 장모양과 김모양이 중국에서 목사님을 성폭행 혐의로 고소했었을 때 성폭행을 마약사범 같은 중범죄로 생각하는 중국에서 10개월간의 모진 조사를 진행하고서 결론은 ‘무혐의’로 처리 된 건으로 무협의를 뒷받침할 수 있는 명확한 증거들이 확보 되었고 이 후 성폭행 피해자 중 한 명이 허위 고소를 했다는 양심선언을 하고 고소를 취하하기까지 했었지만 결국 한국에서의 판결은 ‘뚜렷한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법관의 자유심증에 의해 10년 형이 내려졌었던 것.
이 두 사건은 놀라울 만치 비슷한 궤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에 선교회 회원 모두가 이번만큼은 전례와 같이 ‘뚜렷한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무죄추정주의와 증거재판주의가 배제된 채 안타까운 결론이 나는 그런 상황이 재발이 되지 않도록 강력히 호소하는 입장으로 이렇게 ‘광장’에 서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