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分錢專欄 by 奉局長

「奉局長」的三分錢專欄時間! 局長的文筆水準或許不值「三分錢」…但還是解開主日話語後採用世上的語言撰寫成專文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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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곳에 있는, 보편적 진리이게 하라

‘카톨릭(Catholic)’은 그리스어 ‘카톨리코스(katholikos)’에 그 어원을 두고 있는데 이는 '모든 곳에 있는, 보편적'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라고 합니다.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이 있음을 강조하며 복음을 전했던 바울과 제자들에게 ‘그리스도교’는 새로운 시대 종교로서 보편적이고 개방적인 종교였으며 이를 계승한 구교(舊敎) 역시 오직 유대인만이 여호와의 유일한 선민, 구원의 대상이라 주장했던 ‘유대교’가 갖는 폐쇄성, 특수성에서 벗어난 종교 임을 강조하여 굳이 ‘카톨리코스(katholikos)’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카톨릭(구교) 역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라틴어 성경 외 그 어떤 언어로도 성서를 번역하는 행위를 이단의 행위 (성서를 번역하여 화형을 당한 죤 위클리프, 윌리엄 틴데일)로 간주하면서 보편성과 유연성을 상실 하고, 이른 바 ‘진리’에 대한 소수 집단의 독점을 통해 급기야 ‘면죄부 발행’이라는 몰 상식적인 행동까지 하면서 ‘이상한(?) 종교’로 변질 되었습니다.

이에 다시 루터(M. Luther), 쯔빙글리(H. Zwingli), 칼뱅(J. Calvin)등이 ‘어느 곳에서나 아무나 읽을 수 있는(보편화, 일반화) 성서’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 개혁’을 통해 신교(新敎)를 등장시켰습니다.
‘진리’를 자유케 한 이 사람들을 당시 구교의 시각에서 바라 본다면 당연히 ‘대항하는 사람, 따지는 사람’인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들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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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단상에서 하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면  과감하게 단을 치우고 누구라도 올라 춤과 노래의 영광의 무대로 바꿀 수 있었던,

성 역할에 대해 매우 보수적인 환경하에서 여성 목회자를 과감하게 선발했던 우리 선교회

그 행보가 너무 앞섰던 것이었을까요?
기성(旣成)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로 보여졌을 것은 당연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 옛날 윌리엄 틴테일 (William Tyndale, 1494-1536)의 말 처럼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면, 그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는가? 사제, 추기경, 교황이겠는가? 그 어떤 이름이 될 수 있을까? “

우리는 당당할 수 있었습니다.
진정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으며, 어떠한가를 안다면 그 누구도 감히 시시비비를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종교’에 있어서의 ‘개혁, 혁신’이라는 것은 어쩌면 ‘폐쇄적’이고 ‘특수한’ 형태로 ‘획일화’ 되는 모습을 벗어나,
보편화 되고 일반화 되면서 누구에게나 개방적이고 유연하게 ‘상식’으로 변화 되는 과정인지 모르겠습니다.


단지 그 ‘과정’이 세상과의 적당한 ‘타협’(세속화)이 아니어야 할 것이며,

오직 하늘을 사랑하고 그 선한 뜻을 이루기 위한 목적에 부합되는 것이라면 말입니다.
 
금주 정명석 목사께서는 “시대가 급변하니 이전 수준으로는 감당을 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한 번 만들었다고 끝난 것이 아니라, 시대 따라 계속 만들어 가야 된다.”, “새 집을 지으려면 옛 집을 부수고 새로 짓듯” 그렇게 과감한 혁신(革新)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선교회도 2018년 새로운 희망과 감사의 해를 맞아 더 차원 높인 도약과 비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이 전의 ‘머리’로서는 지금을 살 수 없다.”하신 정명석 목사님 말씀처럼 이제는 우리도 기성화 된 면은 없는지,
우리 안에서 폐쇄적이고 획일화 된, 상식적이지 않은 모습들은 과연 없는지 스스로 돌이켜 봐야 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혁신을 통해 더욱 새로워진 선교회가 되어 세상을 향해 한 걸음 더 당당하고 열린 모습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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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