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分錢專欄 by 奉局長

「奉局長」的三分錢專欄時間! 局長的文筆水準或許不值「三分錢」…但還是解開主日話語後採用世上的語言撰寫成專文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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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새의 하루와 한 오백년

 '아침이 밝는구나 언제나 그렇지만 

 오늘도 재 너머에 낱 알갱이 주으러 나가 봐야지' (송창식의 '참새의 하루' 중에서)


참새는 아침이 밝으니 재너머 낱 알갱이를 찾아 먹고 노래 하면 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말고... 마6:34)


그저 내일도 해가 떠 올라 밝을것이고, 재너머 가면 어김 없이 낱알갱이가 있을 것(하나님께서는 때에 따라 하셔야 할 모든 것을 다 하신다는) 이란 믿음, 신뢰. 

이것이야말로 세상을 지으신 이에 대한 신앙의 가장 원초적 모습일지 모릅니다.



'더운 여름 고생하며 먹을거리를 준비한 개미들은 각종 관절염과 피로에 지쳐 겨울 내내 그 고생을 이어가고, 그저 기타 치며 노래 부르는 것으로 여름을 즐기던 배짱이는 유명 가수가 되어 겨울 동안 무료한 곤충들의 초대에 콘서트를 열어 주고, 개미들 보다 더 많은 먹거리를 얻어 행복한 겨울을 지냅니다.'


월명동 수련원장님께서 "그 날 그 날 하루하루 먹고 땡! 하는 인생이 사실은 행복한 삶"이란 말씀과 함께 모두 'carpe diem(카르페디엠, '현재를 잡아라'는 뜻의 라틴어)'을 잘 표현한 이야기들입니다.



혹자는 수렵,채취의 원시 공산사회가 이상향에 가까웠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냥을 실패한 날은 굶기도 하겠지만, 제대로 사냥하면 배불리 먹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운이 좋아 아무리 큰 먹이를 사냥했다고 해도 저장 기술이 없었기에 하루 이틀 뜯어 먹고서는 금방 버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하니 '썩어 버리는 옛 것'에 대해 미련도 없었을 것이고, 내 것으로 따로 챙기려는 욕심도 또 그로 인해 다투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정착하는 농경생활로 전환한 뒤 저장의 기술과 이기(利器)들이 발달하면서는 지켜야 할 '기득(旣得), 곧 옛 것'들이 많아지게 되고, 그러다 보니 사유하고자 하는 '욕심'이 자연스럽게 수반 되어 '분배'에 대한 문제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현대 사회, 대부분의 난제들은 이 '사유욕'과 '분배'에 관련 된 것들인듯 합니다.


'기득권(옛 것)'을 지키려고 하면 걱정이고 염려입니다.


지켜야 할 것들이 많으니 갈수록 더 높은 담을 쌓아야 되고, 

높은 담은 '단절'을 야기하며, 단절 된 '고독'한 인생은 가진 것이 아까워 '한 오백년은 살고 싶다' 어리석은 욕망을 키우게 되는 것입니다.

단절, 고독, 어리석은 욕망. 이런 것들이 인생의 '한(恨)'을 쌓아 가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저 하루하루 '오늘'에 집중하는 삶을 추구한다면, 

그러다가 오늘은 특별히 '멧돼지 사냥'에 성공했다면, 그야말로 '흥(興)'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버려야 할  '옛 것'들을 많이 갖고 있으면 '한(恨) 많은 인생'이고,

'옛 것'들을 과감히 버리고 장사 지내며 산다면 '흥(興) 많은 인생'이 되는건지 모르겠습니다.


성서를 통해 봤을 때 창조주께서는 지극히 '현재'를 중심한 소박하고 간결한 삶을 계속 권고하십니다.



구약의 모세를 만난 장면을 보면 '네가 선 곳이 거룩한 땅이니 발의 신을 벗어라' 하십니다.


'네가 선 곳'은 원어로 '마콤(maqom)'으로 표현 되었다고 합니다.

그 뜻은 '일상(日常)의 현장'입니다. 

모세가 양을 치면서 지겹도록 다니던 그 곳. 대상(隊商)들도 함부로 지나 다니고,

낙타가 아무렇게나 소변을 누어 대는 '광야'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 '광야'에서도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흔해 빠진 '떨기나무' 한 그루에 임재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아니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그 '거룩한 곳'은 사실 출근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버스 정류장이고, 주부들이 설겆이를 하는 주방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거룩한 곳'에서 우리는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인데, 이 '예배'의 히브리어도 '아보다(avodah)'로 '노동, 직업,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신을 만나는 거룩한 장소가 따로 없고, 경배하는 일과 일상에서 자기가 하고 있는 일도 분리 되어 있지 않다는 뜻인가 봅니다.


여호와를 만난 그 곳에서 우리는 단지 '신발'을 벗어야 하는 것만 강조하실 뿐입니다.

'신발'은 지금 하나님을 만나러 오게 한 나의 '과거'입니다.

여태 나를 태우고 여기까지 오게 해 준 '배'입니다.(강을 건넜으면 이제 떠나야 될...) 

과거의 내 삶을 지탱하고 유지 해 온 내 의지, 내 생각들일 것입니다.


나의 '옛 것'을 버리고 여호와를 뵙는 바로 이 곳, 내가 서있는 이 곳이 '거룩한 곳'입니다.

'신발'을 벗고 나에게 주어진 현재의 일을 새롭게 하는 것. 이것이 '예배'입니다.


정명석 목사께서는 금주 말씀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 나이 때(현재), 바로 그 곳(현장)에서 그 때에 해당 되는 모든 일을 다 하고 끝내시니,(이를 믿고 신뢰하면서) 우리들도 그에 맞춰 역사를 뛰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더욱이 '이 때(현재)'를 맞춰 태어난 자들은 '천운을 탄 자'임을 강조 해 주셨고, 이 때(현재)를 놓치고 만다면 '천운을 버린 자'가 되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신을 벗어라(과거를 장사 지내라)'명하시는 하늘의 음성에 따라 즉시 자기 발의 신발(옛 것)을 과감히 벗어 버리고, '지금', '바로 이 곳'에서 천운을 타고 날아 오를 수 있어야하겠습니다.  


사실 날고자 하는 이에게 '신발'은 정말 필요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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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17/4/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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