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分錢專欄 by 奉局長

「奉局長」的三分錢專欄時間! 局長的文筆水準或許不值「三分錢」…但還是解開主日話語後採用世上的語言撰寫成專文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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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을 받고 모든 ‘간절하지 않은 것’들과 결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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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다를 꾸짖으신 예수의 가르침


  여러분들께서는 하늘 역사 위해 하시는 일들에 대해 정말 간절하게 뛰고 계십니까?
  간절하지 않은 삶은 아무것도 이룰 게 없을지 모릅니다. 졸면서 기도 하고, 남들 하는 만큼 봉사하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적절한 물질 기여도 하며, 그저 시간 나면 선교도 해 볼까 하는. . . 그러면서 마치 하늘 역사를 위해 ‘꽤 많은 일들’을 하고 있다고, ‘큰 희생을 하고 있다’고 자위(自慰)하면서 사는 그런 삶은 예수께서 경계하라 하신 서기관, 바리새인들의 ‘회칠한 무덤 인생’과 가깝다고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이일 저일 매사에 얼굴 비추며 모범적인 것처럼 행하는 사람들이 정작 뜨거운 성령을 못 받게 될 확률이 높을 수 있습니다. 정말 나는 이 ‘역사’가, 그리고 현재 ‘내가 하는 일’이 ‘그토록 간절한가?’ 스스로에 물어봐야 합니다. 차라리 간절하지 않은 일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야 어떤 한 가지 일에라도 제대로 해야만 하겠다는 간절함이 생길 수 있을 테니까요.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간절한 일’ 한 가지를 제대로 하는 마리아는 칭찬하시고 남들 눈치 보며 ‘해야 할 것 같은 일’들로 분주했던 마르다를 꾸짖으신 예수의 가르침이십니다.




‘성령의 임재’는 바로 '간절함'


  생각 없이 주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며 지내던 제자들이 새로운 역사의 위대한 ‘사도’로 변화된 것은 바로 성령의 임재 때문입니다. ‘성령의 임재’는 바로 '간절함'으로 나타났을 것입니다. 사랑하던 주를 그리 홀로 십자가에 보내고 나서 뒤늦게야 ‘간절해진’ 제자들. . .
간절해진 베드로는 하루에 3,000명을 전도합니다.


  베드로가 말씀을 외치면 서로 언어가 틀린 사람들도 모두 알아들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그 말씀을 필자는 신비와 기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바로 ‘간절함’으로 이해를 해봅니다. 정말 ‘간절하게’ 외치는 자에게 길 가던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고 멀리서 잘 안 들려도 그 간절함에 감동되어 “도대체 저 이가 하는 말이 무엇인가요? 누가 통역 좀 해 주세요…,”, “잘 안 들려서 그러는데 들리는 사람 있으면 저토록 간절하게 외치는 말이 무엇인지 좀 전해주세요…” 그렇게 3천 명이 베드로의 간절함에 ‘시대’를 깨닫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미국 한 대학에서 실험한 사례입니다.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어떤 지역 선거에 입후보한 각 후보자들의 유세 연설 동영상을 묵음(默音) 처리하여 눈으로 보게만 해 주고 당선자 예측을 하게 했더니 그 결과가 놀랍게도 실제 당선결과와 일치했다고 합니다. 후보자들의 '간절함'과 '전문성'이 하는 '말'과 '내용'과 상관없이 그저 그들의 몸짓, 표정, 눈빛만으로도 전달된 것입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얼마나 간절하게 외쳤는지 짐작이 갑니다. 얼굴은 상기되었고 눈은 충혈되어 눈물이 머금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낮에 술에 취했다고 오해를 받기까지 한 것이 아닐까요?(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간절하면 하나도 뺏기지 않고, 지금보다 더 속도를 내어 빨리 행하게 된다


  정말 간절하면 ‘절도, 강도, 사기꾼이요, 훼방꾼인 사탄이 떼로 몰려와도 그 어떤 것 하나도 뺏기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 간절하면 지금보다 ‘더 속도를 내어 빨리 행할 것’입니다. 정말 간절하면 ‘통쾌하게 도둑을 잡듯 사탄도 잡고, 불의도 잡고, 자기와 겨루는 자와의 싸움에서도 반드시 이기고 말 것’입니다.


  구원의 차원은 내가 행한 일들의 ‘가짓수’로 결정되기보다 얼마나 ‘간절하게’ 행했는가로 결정
될지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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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7/10/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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