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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작 정명석
◉ 각색 주재형
공자와 맹자께서 가신 후 한동안 이 땅에 현자(賢者)의 출현이 없더니, 마침내 ’해 돋는 나라‘에서 새로운 현자가 나타났다.
삼라만상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 애쓰는 '문자(問子)'와 천지간의 이치를 깨우쳐 속 시원하게 답을 주는 '답자(答子)'가 바로 그들이었다.
답자(答子)의 집을 오랜만에 찾은 문자(問子)
“자네 무슨 책을 그리도 열심히 읽고 있는겐가?”
반가이 맞는 답자
“오! 문자 자네 왔는가? 이 책? 척 보면 모르겠는가? 성경일세”
“성경이라,,, 나도 일찍이 관심을 두고 읽었던 적이 있었네만,,,
도무지 창세기부터 허황된 이야기로 시작이 되니 좀처럼 진도가 안 나가더군.”
“허황된 이야기라고?”
“그렇지. 허황되고말고!”
문자의 눈이 번뜩 빛나는 듯하더니,
“당장 하나 물어봄세. 도대체 자네는 창조주가 단 엿새 만에 천지를 창조했다는 그 이야기가 허황하지 않는가?”
“하하하! 그렇지. 창세기 그 시작부터 의문스러우니 도무지 성경이 읽히지 않았던 것이군.”
“6일 창조론...뭐 고대(古代)의 사람들이야 믿었을지 몰라도 현대인들 중에는 누가 믿으려 하겠는가?
그런데도 성경이 여전히 베스트셀러인 것이 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네. 자네는이것에 대해 내게 설명을 해 줄 수 있을까?”
“성경은 참으로 신묘한 책이라네. 그 속에 문제와 답을 다 담고 있거든”
“문제와 답을 다 담고 있다고?”
“그렇지, 오직 어떤 문제에 대한 답이 어디에 있는지 그 짝만 찾을 수 있으면 되는 거지”
“그런가? 잘 이해가 되지 않네만...”
긴가민가 머리를 긁던 문자가 불현듯 아이디어가 떠 올라
“아니 그럼 ’6일 창조‘ 이 의심스런 대목에 대한 해답도 성경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성경에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년과 같고 천년이 하루와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고 한 말씀이 있다네 이를 두고 ’축소 확대의 원리‘라고 하는데...
’하루‘는 천년 아니 1억년이 될 수도 있고 10억년이 될 수도 있으며 이처럼 천년, 1억년을 ’하루‘로 표현하실 수도 있다는 말씀이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하루’는 오늘날의 ‘24시간’이 아닌 특정한 한 ‘기간(혹은 단계)’을 두고 말씀하신게야.”
“그렇게 푼다면 창세기의 6일은 6천년이 될 수도 60억년 혹은 과학자들의 말대로 130억년이 될 수 있다는거군. 그거 참 흥미롭구먼...”
이에 답자는 더욱 신이 난 듯 말을 이어간다.
“이 ‘확대 축소의 원리’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여 하나님과 인간 그 입장과 시각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원칙이라네.
예를 들어 ‘생쥐’ 앞의 ‘고양이’는 ‘사람’ 앞의 ‘호랑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마찬가지로 ‘사람’ 앞의 ‘호랑이’는 하나님 입장에서는 ‘고양이’일 수 있다는 말일세.”
“오호라 그거 말이 되는 군 말이 돼.”
“그렇지. 이처럼 그 ‘입장’을 이해하고 그에 따라 축소와 확대 개념을 접목하여 보면 성경은 신화와 허구의 세계가 아니고 정말 우리 인생에 있어 반드시 제대로 읽어 보고 깨달아야 할 가치 있는 진리,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다네”
“음... 아주 인상 깊네 그려. 자네와 성경,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를 이어 나가봐야 하겠군.”
“나야 대환영일세 하하하”
답자의 호쾌한 웃음소리에 문자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난다.
문자(問子) 왈(曰),
“허구처럼 보이는 성경을 제대로 보기 위해 가져야 할 성경을 보는 관(觀). 그 핵심 원칙이 있다면 무엇인가?”
답자(答子) 가라사대,
“화자(話者)로서의 하나님과 청자(聽者)로서의 사람. 그 입장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 일환으로 ‘축소, 확대의 원리’를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