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의 분노는 한번 불붙으면 걷잡을 수 없다.15세기 중엽부터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 곳곳에서 벌어진 마녀사냥은 단순한 미신의 산물이 아니었다. 종교개혁을 둘러싼 신·구교의 갈등, 교황청과 국가 권력의 이해관계, 재산 몰수라는 탐욕이 얽히면서, 수많은 무고한 이들이 화형대와 교수대로 내몰렸다.
교황 직속의 이단 심문소는 물론, 국왕과 영주가 주재하는 세속 재판에서도 ‘이단자’ 심문이 벌어졌고, 몰수할 재산을 노려 교회와 국가가 경쟁하기도 했다. 그 불길은 세월이 흘러도 꺼지지 않았다.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매카시즘’ 공산주의자 색출, 사회주의 국가의 인민재판까지—시대와 장소만 달라졌을 뿐, 특정 집단을 악으로 규정하고, 여론이라는 불길로 태워버리는 방식은 그대로였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예외일까?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 방영 이후, 한 종교단체와 정명석 목사는 ‘성범죄자 집단’이라는 거대한 프레임 속에 갇혔다. 언론은 선정적인 자막과 편집, 피해자라는 일방의 진술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러나 재판 과정을 들여다보면, 사건의 실체는 훨씬 복잡하다. 피해를 주장하는 고소인들이 실제로는 해외여행, 각종 대외 활동, 활발한 SNS 활동을 이어왔던 정황, 피해 발생 시점에서 4년이 지나서야 고소가 이루어진 점, DNA 등 직접적 증거가 단 한 건도 없었던 점, 조작 가능성이 제기된 녹취파일, 피해 진술의 번복…
특히 장모 씨의 양심선언—“피해 사실이 모두 거짓이었다”—조차 재판 결과에 반영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언론과 여론은 ‘종교’와 ‘성범죄’라는 자극적인 키워드를 엮어 이미 결론을 내려버렸다.이는 헌법이 보장하는 무죄추정의 원칙과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형사소송법의 대원칙마저 흔드는 일이다. 결국 법정은 증거보다 편견을, 실체적 진실보다 여론을 좇는 길로 흘러갔다.
이것이 바로 현대판 마녀사냥이다. 대상은 종교 지도자일 수도, 정치인일 수도, 오늘 뉴스에 등장하는 익명의 누군가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우리가 보고 듣는 ‘사실’이 정말로 사실인지, 아니면 누군가 만들어낸 이야기인지 스스로 가늠해야 한다는 점이다.
언론의 거울이 기울 때
언론은 사회의 거울이자 기록자다. 하지만 거울이 기울면, 그 안의 세상도 왜곡된다. 방송은 공론장으로서의 기능을 다해야 하며, 이를 위해 공정성, 공익성, 독립성이라는 세 가지 핵심 가치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러나 일부 언론은 권력과 자본의 이해관계에 휘둘리며, 불편한 목소리를 배제하고 ‘한쪽 이야기’만을 퍼뜨린다. 심지어 건설사와 같은 거대 자본이 언론사를 소유·지배하며 자신들의 이익에 맞춘 기사 배치와 여론몰이를 하는 현실에서, 공정성은 뿌리째 흔들린다.
언론이 해야 할 최소한의 일은, 한 사안을 둘러싼 모든 이해당사자의 입장을 균형 있게 전달하는 것이다. 시청자와 독자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사실과 근거를 가감 없이 내놓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특정 관점을 취할 수는 있지만, 반드시 정당한 사실에 근거해야 하고, 이익집단의 개입은 철저히 배제되어야 한다.
역사는 반복된다
신약 성경 속 예수님 시대에도, 본질을 보지 못한 채 ‘신성모독’이라는 혐의로 메시아를 십자가로 몰아넣은 사건이 있었다. 당시의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표적과 가르침을 보면서도,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모함과 여론몰이를 택했다. 그리고 그 표적을 믿고 따르던 이들마저 핍박했다. 그 구조와 심리가,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대판 마녀사냥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역사는 말한다. 무지와 편견이 결합된 군중심리는, 언제든 또 다른 마녀사냥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따라서 언론이 그 불씨를 키울 수도, 끌 수도 있는 책임을 지닌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질문
언론이 그 역할을 다하지 않을 때, 공백을 메울 사람은 결국 우리다. 누군가를 단죄하기 전에, 여론의 파도에 휩쓸리기 전에,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건 진짜 사실일까, 아니면 누군가가 만든 이야기일까?”
그 질문을 놓치지 않는 순간, 우리는 마녀사냥의 군중이 아니라, 진실을 찾는 증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