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엔 자신감 뿜뿜이었다. 활달하게 친구들과 잘 지내고 고무줄이나 오징어가생, 죽말타기 놀이에 우선으로 뽑혔다. 중1 어느 날, 사진 속에서 찡그린 얼굴을 한 내 모습이 좀 낯설었다. 처음 나를 자각했다. 중3 여름 방학, 농부의 딸인 나와 여동생이 밭에서 일하고 돌아오는 길. 동네 아저씨들이 담배 가게 앞에 모여앉아 있었다. 그 앞을 지나가는데 뒤통수에 들려오는 말 “저 집 둘째 딸이 인물이 더 좋아”
나는 첫째 딸이다. 순간 당황스럽고 뭔지 모를 수치스러움을 느끼고서 속상했다. 부모님은 한 번도 내 외모에 대한 언급이 없었는데, 동네 사람들의 뒷담을 듣고서 나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제야 엄마, 아버지의 외모를 닮지 않은 나의 모습이 보였다. 동생들과 달리 이쁘지 않은 부분을 모아놓은 얼굴과 신체라니. 그날 이후 몸에 대한 자존감은 떨어졌다. 동시에 나에 대한 자아존중감도 낮아져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주저하고 평가받는 것이 두려워졌다. 굵은 손마디, 허리선이 없는 배, 넓은 어깨가 의식되었다. 예쁘지 않은 나를 좋아할 사람이 있으려나!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로 나를 지각하니 내향성이 짙어지고 성격은 소심하고 말수가 적어졌다. 거울 속에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르네이 엥게른은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에서 디자이너, 과학자, 의사를 꿈꾸는 소녀들의 의식 너머에 정말 되고 싶은 것은 ‘날씬해지는 것과 예뻐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말 그럴까? 그런 것 같다. 강남의 수많은 성형외과, 다이어트와 화장품 산업의 호황이 이를 방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르네이 엥게른은 “우리는 거울을 볼 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지 않는다. 대신, 몇 년간에 걸쳐 주입된 문화, 친구와 가족에게서 들은 말, 그리고 내적인 고민에 의해 형성된 모습을 본다”고 한다. 이는 내가 사춘기 초입에 동네 아저씨들 앞을 지나가면서 들었던 말로 인해 신체에 대한 자각이 일어난 것을 표현하고 있다. 거울을 통해 보는 것은 나의 시선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판단이었다. 다른 사람이 보는 시선의 대상이 되었던 거다. 동네 아제들의 말에 따라 나와 동생을 비교함으로 나의 자존감은 떨어지고 ‘나를 사랑해줄 사람이 없을 거야.’라는 생각까지 했었다니 억울한 마음이 든다.
오늘날 미디어는 우리 몸에 대한 이상적 기준을 왜곡시키고, 연예인의 외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외모를 매력적으로 꾸미라는 강박’을 더욱 부추긴다. 광고 속 인물과 나를 비교하며 ‘나는 부족하다’고 느끼게 한다. 광고에서 보여주는 제품을 구입하여 나의 부족을 채우게 만드는 전략에 영락없이 빨려들게 된다. 광고 속 모델을 이상적으로 설정하여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하게 된다. 일상에서 사람을 만났을 때도 상대방의 신체에 대한 언급이 인사가 되었다.
몸에 대한 자기 정체성을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할 수 있을까? 동네 아제들의 뒷담을 들은 이후 마음에 들지 않는 나의 몸을 드러내는 사진을 찍지 않았다. 우연히 친구들과 온몸을 부대끼며 찍은 사진 속의 나를 발견하기까지 그랬다. 사진에서 활짝 웃는 우리를 국어 선생님은 ‘단순호치’라며 칭찬했다. 그날 이후 사진 찍을 때는 활짝 웃는다. (사실은 웃는 연습을 좀 했었다.)몸에 대해서 긍정적 피드백도 받았다. 원피스를 입고 열심히 걸어가는 나를 뒤 쫓아온 어떤 화가는 모델이 되어달라고 했다. 친구도 멀리서 본 내가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며 뒤태를 부러워했다. 내가 보지 못하는 뒤통수가 매력적이라는 말에 기분이 좋았다. 한번은 위 조영 촬영을 받았는데 의사가 “위가 참 예쁘네요”라고 했다. 이렇게까지 몸 칭찬에 굶주렸나?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한 긍정적 피드백으로 다소나마 의기소침에서 벗어났지만, 이 또한 몸에 대한 언급이기에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외모 칭찬을 갈구하고 있는 모양이 다소 우습지 않은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외부인의 시선에 따라 만들어진 나의 신체상, 내 몸의 정체성이다. 내 몸은 존재의 기본이니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멋져 보이게 만들기보다 내 신체의 기능에 집중하면 어떨까? 다리가 있어 걸어 다닐 수 있다. 늘씬한 각선미가 돋보이지 않더라도. 눈으로는 책을 볼 수 있다. 왕방울 눈이 아니어도. 타이핑할 수 있는 손은 정말 훌륭한 일을 한다. 섬섬옥수는 아닐지라도. 이렇게 생각하니 동생의 역삼각형 얼굴과 나의 사각 얼굴을 비교한 동네 아제들의 말은 폭력이었다. 무슨 권력으로 소녀의 마음에 생채기를 냈단 말인가. 그들의 신체 평가에 휘둘렸던 15세 소녀는 이제 당돌히 그들에게 얼굴을 확 들이밀며 외쳐버릴 테다. “내 얼굴이 어때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