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한편 잊지 못할 따스했던 겨울.
캐나다 북쪽으로 향한 낯선 길에 만난 시간. 해외여행은 여러 번 가 보았지만, 해외 현지살이는 처음이다. 공항으로 마중 나온 홈스테이 메리 아줌마를 만나니 캐나다에 온 게 실감이 난다. 약간의 긴장감과 함께 설레는 발걸음을 떼었다. 몇 주가 흘러 캐나다의 고운 단풍도 잠시 곧이어 겨울옷을 입기 시작하는 자연. 캐나다의 혹독한 겨울만큼 이 여정은 얼마나 길고 길까.
생각보다 별 탈 없이 잘 지내던 어느 날, 잔잔한 바다에 풍랑이 일었다. 룸메이트 일본 친구와 사소한 오해가 생긴 탓이다. 내가 그 친구 노트북을 잠깐 빌려 사용하는 사이에 바이러스를 먹었다고 다짜고짜 노트북을 물어내란다. '이건 좀 아니지.' 약간 억울함이 몰려왔다. 그런데 진심 화난 표정이나 말투는 아닌 트집 같기도 한 쎄~한 느낌. '이건 뭐지? 진짜 내가 인터넷 사용해서 그런 거 맞아?' 옆에서 우리 대화를 듣던 메리 아줌마가 갑자기 일방적으로 일본 친구 편만 든다. 자기도 남의 노트북은 함부로 안 쓴다며 왜 나더러 남의 것 사용해서 이런 난리가 났냐는 거다. 울컥한 마음에 나도 붉은 고구마가 되어 말대답을 해버렸다. 그렇게 치면 학교 공용 컴퓨터는 인터넷 사용한다고 바이러스를 단번에 먹냐고. 나만의 잘못만은 아닌 것 같은 물증 없는 의심만 든다.
그러다 옆집 홈스테이 베브 아줌마네에 가게 되어 저녁 시간을 보내는데 메리 아줌마가 종종 학생들과 사이가 안 좋았다며 별일 없냐는 이야기가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성격도 예민해서 이웃이지만 사이가 썩 좋지 않다는 솔직한 베브 아줌마의 이야기에 며칠 전 감정이 울음과 함께 폭발했다. 말 안 해도 이해한단 듯이 말없이 다독여준 베브 아줌마. 한껏 쏟아내고 나니 마음이 추스러졌다. 늦은 밤 기분전환 겸 신이 준 선물을 보러 가자며 룸메이트 친구들과 같이 드라이브시켜주겠다고 나섰다. 그렇게 한참 달려온 시린 겨울밤. 하늘엔 태어나 처음 보는 환상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캐나다 추운 북쪽 지방에서 볼 수 있는 오로라를 제대로 만났다. 보랏빛도 감돌고 청푸른 신비한 색이 대기에 칠해진다. 잠시 시계가 멈추고 우주 어느 한 곳에 홀로 서 있는 묘한 기분이다. 그날 밤 나는 마음의 큰 선물과 위안을 받았다. 푸근한 나의 외할머니를 닮은 베브 아줌마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며칠 뒤 일본 친구는 그때 일은 괜찮다고 먼저 말을 꺼낸다. 조용히 그 일은 끝나고 평온을 되찾은 일상. 베브 아줌마는 오늘도 밝게 웃으며 나지막이 인사를 건넨다. "Good morning! It's sunny, eh?"
그때의 힘듦을 잘 견뎌낼 수 있었던 힘은 누군가의 진심 어린 관심과 따스함이었음을 깨닫는다. 마음에 상처받고 누구 하나 내 편이 없다고 느낄 때, 정말 외롭고 삶이 다한 것 같지만, 내 사람 한 명만 있으면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다. 어두운 밤 환히 비추어줄 별의 속삭임을 기억하며 읊조려본다.
"지치고 힘들 땐 언제나 그대 곁에 서서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손 꼭 잡아 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