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근대화와 일본의 근대화는 사뭇 다르다.
중국은 동아시아의 최강, 아니 그들이 생각하기로 전세계의 최강국가로 생각하고 자부하고 있었으나, 19세기 몰려오는 서양열강의 접근에 어리둥절, 어떻게 할 바를 몰라 갈팡질팡하였다. 중국의 땅을 빼앗아볼까, 중국에 물건을 팔아볼까, 이리저리 보면서 기회만 엿보던 영국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으니 바로 아편전쟁이었다.
당시 영국이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가져와 중국에 판매함으로 많은 양의 은이 중국에서 나가게 되고, 나라의 재정은 바닥을 면치 못했고, 수 백 만 명의 사람들이 아편에 중독 되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모두 피폐되어 있었다.
강직한 관리인 임칙서를 통해 아편을 모두 바다에 던져버림으로 영국은 시비를 걸었다. 그래서 전쟁이 붙었으니, 결과는 영국의 승리로 돌아갔고 프랑스도 여기에 끼어 들었다.
프랑스 선교사를 죽였다는 이유를 대고 프랑스도 같이 전쟁에 합세하여 중국은 난징조약으로 불평등한 조건을 받아들이며 무역항을 개방해야 했다.
이것은 중국이 외세의 침략에 몸살을 앓는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안팎으로 여러 사회적 문제와 전쟁이 일어나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하는 청왕조는 결국 정치체제의 틀을 바꾸면서 1911년 신해혁명으로 황제가 다스리는 전제왕조의 막을 내리게 된다.
이에 반해 일본은 중국의 그런 모습을 보고 타산지석으로 삼았다. 일본 역시도 미국의 무력 협박에 의해 강제적으로 무역항을 개강하긴 했지만, 메이지유신을 단행함으로 빠른 속도로 서구의 문물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모든 것을 본받아야 한다면서 철저한 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억지로 나라의 문을 연 것은 중국이나 일본이나 같았고 국내에서 개항파와 반개항파의 의견충돌은 다 있었으나 대처하는 모습은 사뭇 달랐다. 그리고 이후 중국의 공백 때문이었을까. 일본은 서구열강처럼 제국주의가 되어 여러 나라를 침략하여 식민지를 삼아 전쟁을 일으키더니 1945년 8월 원폭의 투하로 항복하고 일본에 매여 있던 많은 나라들은 독립을 찾게 되었으니, 우리나라 역시도 그러했다.
중국은 돌아가는 세계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자만심과 우월감에 빠져있었고 일본은 돌아가는 세계정세를 파악하여 나름 어떻게 해야 할지 대처를 빠르게 했다. 필요하다면 자신들의 전통이라 자부하던 것도 버렸다.
당신은 중국과 일본 중 어디에 가까운가?
외부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인가?
눈치가 빨라서 즉각즉각 대처를 하는가?
어른들 말 중 눈치가 없는 게 사람이냐는 극단적인 말이 있다.
개인이든 국가이든 눈치가 있어야 한다. 기회주의가 되면 안 되겠지만, 빠른 두뇌 회전과 판단이 필요하다.
근대로의 진입에 몸살을 앓은 중국이 그렇다고 눈치가 없고 판단이 부족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원인 또한 많았다. 중국뿐 아니라 우리나라 조선 역시 쇄국정치로 외세의 침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중국은 수 천 년의 찬란하고 위대한 문화유산을 가진 훌륭한 나라이다.
억지로 하는 것은 자율적이지 않고 힘이 든다. 무슨 일이든 외부로의 강압에 의해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필요에 의해 그때그때 알아서 잘 하면 좋겠다. 억지로 하는 것은 한계를 가지게 되니 말이다.
공부를 잘하게 되는 것도 공부의 필요성을 스스로 깨달았을 때 그때서야 잘하게 된다.
모든 일이 다 그러하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하고 싶은, 혹은 해야만 하는 모든 일들을 스스로 알아서 잘 하길 바란다.
열려라 참깨, 주문을 하면 저절로 열리는 자동문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