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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사의 시사프로그램 그대로 좋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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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대한 해석은 역사가의 관점에 따른다. 그러므로 역사를 기록하는 자는 역사적 사실과 진실을 지극히 객관적으로 정확히 알려고 하는 노력을 가진 자여야 하고 절대 자기의 사적인 감상을 기록에 반영하면 안 된다.


한편, 언론은 동 시대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기록하고 전하는 역할로서 한편으로는 역사가와 같은 지위를 차지한다. 다양한 사회에서 발생하는 많은 사건의 정보 수집과 전달의 수단을 가지지 못한 일반인들은 영향력이 있는 거대 언론이 해석하는 것을 그대로 흡수해야만 한다. 그래서 언론을 나라를 통치하는 입법 사법 행정의 3부에 필적하는, 때로는 능가하는 권력을 가진 단체라 해서 제 4부라고 인정한 지 이미 오래다.


사법부는 증거주의로써 정한 법칙에 따라 판단하고 정한 대가를 물리적으로 치루면 그것으로 끝나지만 언론은 전 국민의 정서를 주도하기 때문에 개인이나 단체가 국민적 비난을 받으면 사회구성원으로서 존재조차 할 수 없게 될 수도 있으니 오히려 사법부보다도 더욱 사안의 정확성에 책임이 있는 곳이 언론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MBC 실화탐사대에서 방송한 정명석 총재에 대한 프로그램은 구성과 연출에서 미흡한 부분을 많이 담고 있다.

첫 번째, 첫 장면인 제보자와 피디의 만남에서 한 차량이 제보자를 미행하는 듯한 연출이 나왔다. 그런데 그 차량이 정말 제보자가 두려워해야 할 차량인지는 전혀 확인이 없다. 그 차가 제보자를 미행한 차라는 근거와 확인이 전혀 없는데도 미행하는 차량이 있다는 것처럼 보이게 한 연출은 시청자들에게 지금 이 사건이 긴박하고 위험한 일이라는 분위기를 만들어 관심을 끌고자 하는 의도로만 보인다.

이어서 약 10년, 20년 전에 이미 방송에 수차례 소개되었고 또한 정명석 총재가 재판을 받고 형기를 마친 사건에 대한 장면을 내보냈는데 이는 제작자가 의도하는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자료인 것 같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언론의 무시무시함이다.


법은 한번 재판이 이루어진 결과에 대해서는 다시 거론하지 않는다. 그리고 재활의 기회를 준다. 교화가 법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론은 이미 10년, 20년 전에 지나간 일을 다시 상기시킴으로써 대상자를 회복시키기보다는 사회적 매장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논리의 맥락과 국민의 알 권리를 빙자하여 개인의 존재감과 정체성을 살해할 수도 있는 지극히 위험한 언론의 힘이다.

세 번째는 피해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호소를 담았는데 사법부의 경우는 어떤 국민적 공분을 산 피의자라 할지라도 자신의 입장을 말할 권리를 준다. 그리고 쌍방의 입장을 들어본다. 그런데 이번 프로그램은 모두 일방적이다. 피해자들의 입장에서 아무리 도움을 호소하더라도  언론이라면 반드시 반대 의견을 병립시켜야 객관성과 형평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데 이 부분에서는 일방적이어서 객관성과 형평성이 없다. 게다가 패널들의 반응은 더 심각하다. 모두 피해자의 입장에 서서 감성적 표현을 곁들여 분위기를 몰아가고 있다. 시청자들이 스스로 진실을 분별하고 판단할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다. 시청자들은 판단은 물론 감정까지도 패널들에 의해 강제됐다. 여기에는 자기는 항상 옳다고 주장하는 언론의 오만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네 번째, 글과 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맥락이다. 말과 글에서는 어떤 단어도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단어라도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느냐에 따라 전혀 의미가 다르다. 이 프로그램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인터뷰와 재연 등에서는 맥락이 무시된 채 단어만 나열되어 작가의 의도대로 조성이 된 느낌이 너무나 강하다. 더욱이, 말은 글과 또 달라서 맥락을 이해했어도 사용되는 단어의 억양과 장단에 따라 감정의 표현이 다르므로 말의 맥락을 놓치면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이래서 언론인에게는 참으로 객관성 공정성 형평성이 절대적으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자질이다.


<잃어버린 자녀와 그 부모>라는 표현은 보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우선 부모의 편에 서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다. 이 장면에서 자녀들은 혹세무민의 종교에 현혹된 무지하고 파렴치한 청년이며 부모는 사랑하는 자녀를 잃은 가녀린 피해자의 모습이다. 부모가 잘못 됐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자녀들을 그렇게 ‘무기력하고 한심한 사람일 뿐’이라고만 평가하기엔 우리가 받는 다른 정보가 전혀 없다. 그 가족에게 일어난 사연들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시청자들은 제작자가 주장하는 것 외에 분별과 판단의 기회를 전혀 얻지 못했다.

다섯 번째, 종교의 자유는 국민의 기본권이다. 현실에서 사회적인 비난을 받는 종교라 하더라도 그 구성원이 그 안에서 자기 성찰과 만족을 누린다면 그것은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 그것이 권리이다. 그런데 방송에서는 자녀들의 종교적 권리를 감성적으로 비난하고 있다. 언론은 물리적인 법의 의무는 피하면서 오히려 물리적인 공격보다도 더욱 심각한 심리적인 공격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얘기다. 같은 심리적 정서적 공격이라해도 그 당사자가 누구냐에 따라 공격의 강도는 다르다. 특히 종교단체는 물리적인 공격보다도 심리적인 공격이 더 치명적이다. 그래서 종교단체를 다룰 때는 그 기준점을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언론이 국민에게 종교를 선택할 권리를 제한할 권리는 없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 정명석 총재는 재판의 결과를 치르고서도, 그리고 어떤 실질적인 범법행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 국민들에게 개인의 사생활마저 다 까발려져도 좋은 사람인가? 이미 지나간 10년, 20년 전 일마저도 다시 상기시키며 조롱해도 되는 사람인가? 우리 사회는 그를 그렇게 대해도 괜찮을 만큼 떳떳한가? 혹시 요즘 불편한 사회적 이슈를 다른 데로 돌리거나 아니면 돌아선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끌어 모으기위한 언론의 몸부림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건 혼자만의 생각일까?



기사원문 : [JS매거진] http://www.jsmagazine.info/n_news/news/view.html?no=47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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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8/3/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