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_특집간증

다 내가 귀여운 탓이다

-제45주년 알파절 기념 수기 공모전 야심작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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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생명은 부모의 사랑의 결실로 태어납니다. 저도 누군가의 사랑의 결실입니다. 하지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모두가 꽉 찬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지는 못합니다. 부모님이 있어도 꽉 찬 사랑을 받는다는 보장은 없지만, 저는 아버지의 부재로 반쪽짜리 사랑을 받고 성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제 인생에 주어진 첫 번째 캐릭터는 <불쌍한 아이>였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학기 초 담임 선생님이 준 부모의 이름, 직업 등을 적는 별 의미 없는 종이에 서러움이 폭발했던 날이 있습니다. 누구보다 나를 위해 용감해진 엄마에게 저는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했습니다. “왜 나는 아빠가 없어?”.

이런 저의 인생에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저는 그저 지구를 스쳐 간 <불쌍한 사람 1>로 끝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은 앞으로 쓰일 대서사시의 <불행 서사 1>일 뿐입니다. 주인공에게는 어려움이 따라줘야 제맛이니까요.

어머니는 혼자 저를 키울 수 없어 외할머니에게 맡겼는데 삼촌들과 이모들, 외할머니를 통해 사랑을 듬뿍 받으며 구김 없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온 가족이 저를 키웠고, 그 당시 다녔던 기독교복음선교회 교회의 교인들과 이웃들이 저를 키웠습니다. 저는 5∼6세쯤 이모를 통해 전도 되었습니다. 이모에게 물어보니 제가 먼저 교회에 데려가 달라고 했고, 이모도 많은 기도와 고민 끝에 저를 전도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때는 월명동에서 철야 기도회가 자주 있었는데, 따라가면 놀다 잠들 뿐이지만 늘 이모를 따라 월명동에 갔습니다. 요즘도 어린이들을 통해 이어지고 있는 월명동의 전통 놀이 ‘잔디밭 굴러 내려오기’를 하느라 늘 머리와 옷에는 잔디가 박혀 고슴도치였고, 놀다 지치면 이모 곁에 잠들어 여러 삼촌 등에 업혀 내려왔습니다. 이것은 어른이 된 지금도 감사하고 행복한 추억입니다. 동네 어른들도 교회 사람들도 과분한 칭찬과 사랑을 주어 저는 구겨질 틈 없이 잘 웃는 아이로 자랄 수 있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보이는 사람을 통해 많은 사랑을 주시고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바쁜 어머니와 기억도 없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모두 채워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으로 제 인생의 모든 결핍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클리셰 정도로 작게 느껴졌습니다.  

속상했던 생각을 통해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저는 어릴 때 전도되어 전도된 사연이 생각나지 않는 것이 조금 속상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섭리에 전도되기까지 부모를 통해 건강하게 태어나 외할머니 손에 자라며 이모를 통해 전도되는 이 모든 과정에 하나님과 성령님과 성자와 예수님이 관여하지 않으신 것이 없다는 것이 가슴 뭉클하게 감사했습니다.

인생을 제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자동으로 부여받은 슬픔과 어려움으로 저는 어딘가 허름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신랑으로 사랑하며 사는 섭리의 인생을 만났기에 제 인생이 근사해졌고, 소중히 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세상에 둘도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말 잘 듣는 귀염둥이로 자란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는 미취학아동 시절에 전도되지 않았다면 절대 신앙을 가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내가 좋아야 할 수 있고, 싫은 일은 못 하고, 믿어져야 믿고, 보여야 믿는 제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지금도 놀랍습니다. 그 불가능한 일을 해내신 분이 바로 정명석 목사님입니다. 모태 신앙이라 하더라도 성장하며 신앙을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신앙을 지킨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의 삶은 ‘오직 하나님, 오직 예수님’의 삶이셨고, 세상의 질타와 비난에도 ‘하나님의 뜻’을 굽히지 않는 모습이 어린 저에게도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성공한 사람, 열심히 사는 사람은 많이 보았지만, 누구도 ‘나도 그렇게 살고 싶어’라는 감동을 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목사님의 진실한 삶은 ‘기왕 태어난 거 나도 하나님 신부 되어 살고 싶어’라는 다짐을 하게 만들었고 부족하지만, 성경의 말씀을 지키며 예수님을 사랑하며 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저처럼 어릴 때 전도 되거나, 부모가 섭리 교인인 사람들에게 ‘세뇌되었다’ 하며 깎아내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뇌’는 저를 정말 슬프게 하는 말입니다.  
저는 중학교 때 기성 교회 교인인 부모님과 ‘이단 논쟁’으로 큰 갈등을 겪었습니다. 저를 세뇌된 사람으로 단정 짓는 부모님으로 인해 많은 상처를 받았고, 부모님과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정명석 목사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고 오해하니 마음이 아팠지만, 부모님을 이해하고 그 또한 저를 향한 사랑임을 알았습니다. 부모님의 눈에는 그저 이단 종교에 세뇌된 사람 같을지도 모릅니다. 부모님은 착하게 살고자 하고, 진실하게 예수님을 사랑하는 저의 삶을 부정했기에 당시 중학생인 제가 감당하기 힘든 상처였습니다. 가족 중 섭리 교인이 있었지만,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당시 핸드폰이 없어 집 전화를 사용했기에 전화도, 방과 후 시간도 모두 철저히 감시하는 부모님으로 인해 스트레스가 컸습니다. 학업의 부담도 클 나이지만 마음껏 신앙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괴로움이었습니다. 술, 담배도 하지 않고, 건강을 위해 몸에 해로운 음식은 먹지 않고, 성경 읽고 기도하며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부끄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기 위해 노력하는 제 삶은 당당했습니다. 이런 제 삶의 가치관은 정명석 목사님을 통해 배운 신앙의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의 요구대로 섭리 교인으로 사는 것을 포기할 수 없어 스스로 갈등을 자초했을지도 모릅니다. <부모가 엄하면 자식은 닌자가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결국 저도 닌자가 되었습니다.  

일요일에 부모님이 다니는 기성교회 1부 예배를 드린 후 도서관에 간다고 하고 섭리 교회의 주일 말씀을 들으러 갔고, 예배 후 도서관에 갔습니다. 또 새벽 첫 차를 타고 섭리 교회에 들러 새벽 말씀을 듣고 등교했습니다. 닌자 생활을 하며 ‘이 어려움이 언제 끝이 날까?’ 슬프기도 했습니다. '종교와 교리를 떠나 이렇게 착하게 살면서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나, 정명석 목사님의 말씀은 실천해서 손해 볼 것 하나 없는, <종교와 삶을 모두 관통>하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난 언제까지 이 억울함을 견뎌야 하나.’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과 여건 속에서도 언제나 예수님을 사랑하는 목사님을 보며 용기를 냈습니다. 성경도 더 많이 보고, 찬양도 더 많이 했습니다. 기도가 어려워 기도 수첩에 적기도 했는데, 길을 가면서도 적은 날들이 생각납니다. 그 수첩 중 하나를 잃어버렸는데 같은 반 친구가 주워서 읽고 놀리기도 했지만, 그 시절 저는 정말 진지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으로 인해 입은 상처도 신약 성경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치유되었고 용서하게 되었습니다. 정명석 목사님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하나님이 “사랑하라.” 말씀하시니 적군의 목을 끌어안고 사랑했던 것을 저도 부모님을 용서하며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특별한 사춘기를 겪으며 무사히 신앙을 지킨 어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의 반대가 꺾인 후에도 저의 신앙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나’로 인해 오는 어려움은 더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습니다. 성장함에 따라 삶의 시험은 난이도가 올라갔고, 저는 얼마든지 편한 길을 택할 수 있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잠시 하나님을 외면해도 그 순간 목숨을 잃지는 않으니 필요할 때, 어려울 때만 인색하게 하나님을 찾기도 했습니다. 스스로 지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져 신앙의 뿌리가 흔들렸고, 누구도 저의 신앙을 잡아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정명석 목사님은 하나님은 나의 죄 보다 나의 사랑을 더 크게 보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며 제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지금 저의 신앙은 여러 과정을 거치며 거듭 확인한 결과입니다. 어릴 때부터 다녀서 섭리 교회에 다니는 것인지, 정명석 목사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그 말씀대로 실현되는지 확인이 필요했습니다. 목사님은 맹목적인 신앙을 경계하고, 항상 분별과 확인이 중요하다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과 예수님께 묻고 확인하며 신앙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분명하고 확실한 것을 좋아하는 제가 목사님을 신뢰하고 따르는 이유 중 하나는 맹목적인 신앙이 아닌 ‘실천 신앙’을 통한 확인의 정신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섭리와 정명석 목사님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고, 어떤 말들을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과 예수님만을 사랑하며 평생 증거해 온 목사님을 ‘확인’하고 따르는 것이니 ‘뭘 몰라서 따른다’는 이런 말은 하지 말기 바랍니다.

‘귀엽다’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예쁘고 곱거나 또는 애교가 있어서 사랑스럽다’라는 뜻입니다. 이 글의 제목을 <다 내가 귀여운 탓이다>로 붙인 이유는,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과 예수님께는 내가 귀여운 존재일 테니, 너무 사랑해서 나를 섭리에 불러주신 것을 감사하며 유머 있는 제목을 붙이고 싶어서입니다. 또 이 글을 쓰며 저의 인생을 돌아봤을 때 제가 겪은 아픔도 슬픔도 하나님과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서사였다고 생각하니 모두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행복은 마냥 좋은 것만이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정명석 목사님의 삶을 통해 배웠습니다. 행복이 찾아오기까지 슬픔도 괴로움도 거쳐야 한다는 가르침을 잊지 않고 인생의 비바람과 파도를 다 이겨내고 싶습니다. 파도와 비바람을 견디는 것은 분명 어렵겠지만 ‘다 내가 귀여운 탓이다’ 하며 웃으며 이겨내고 싶습니다.  

하나님, 성령님, 성자와 예수님을 행복하게 해드린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며, 때로는 나의 부모가 되어주시고, 나의 친구가 되어주신 하나님과 예수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이 글을 드립니다.





몽구 성도님의 간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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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6/9/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