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머니
가정의 달에 어머니를 생각한다.
여섯째로 태어난 내가 58세이니 어머님께서 올해 93세이시다. 거의 1세기를 사신 분이니 어머님께서 겪으신 일들을 적어놓으면 하나의 역사책이 될 것이다. 어머님이 걸어오신 삶의 반절을 살아온 나도 사연이 많은데 어머님께서는 얼마나 많을까? 그 많은 사연을 가슴에 안고 한 번도 속시원하게 말씀해 본 일이 없었다고 하시는 어머님의 마음속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어머님들이 한이 묻어있다.
여든을 바라보시던 어느 날, 어머님과 우연하게 대화를 하게 되었다.
“사람이 살면서 자기 할 말 다하고 못 산다.”
“어머니! 할 말은 하고 살아야지요. 어머님께서도 이제 할 말하고 사세요.”
“지금까지 참고 살았는데 참는 김에 참고 살아야지.”
“어머님. 아버지한테는 할 말 못하고 살았지만 자식에게는 해야지요.”
“모르는 소리마라. 자식에게는 더 할 말 못한다. 어려서는 말 잘못하면 비뚤어질까봐 못했고, 나이 먹어서는 부모에게 못 한 것 후회 할까봐 못한다.”
갑자기 할 말을 잊고 숙연해졌다.
“제정신 가진 부모는 자식에게 할 말 제대로 못하는 것이다. 할 말 다하는 것이 어디 제대로 된 부모냐? 늘 못해주어서 미안하고 그것이 한이 되어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어머니!”
목이 메어 더 할 말을 잊었다.
“나도 자식들을 제대로 못 먹이고 못 입히고 공부 못 시킨 것이 평생에 마음에 한으로 남았다.”
“어머니!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저희들은 다 감사하면서 삽니다. 그 어려운 시절에 산에서 나무하고 나물장사 하시면서 자식들을 키워 오셨는데 무슨 말씀을 그리하세요?”
“그래도 나는 그렇지 않다. 모든 사연 가슴에 묻은지 오래다. 다시 끄집어 낼 필요 없다. 세월이 많이도 갔다. 내가 시집온다고 서낭당 넘어 온지가 엊그제인데. 그래도 없이 살면서 남에게 얻어다 먹일 때가 행복했다. 잘 산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다. 자식이 손안에 있고 가난하지만 같은 이불 덮고 병아리처럼 나누어 먹일 때가 좋았지.”
“그때는 너무 가난했지요?”
“그렇지. 일을 하려고 해도 일이 없었지. 일해주고 밥만 얻어먹기만 해도 다행이었다. 하루는 남의 집 일을 하러 갔는데 먹을 것이 너무 많은거야. 애들 생각이 나서 그게 내 입으로 들어가야지. 그래서 안 먹고 있었더니 주인아주머니가 왜 안 먹느냐고 하더라. 그래서 배가 불러서 못 먹겠다고 했더니 눈치 빠른 아주머니가 애들 줄 것 챙겨 줄 테니 어서 먹으라고 하더라. 그래서 그랬지. 이왕 줄 거면 내가 안 먹을 테니 내가 먹을 것도 싸달라고. 자식 먹일 욕심에 그런 말이 그냥 나오더라. 일이 끝나고 날아오듯 달려와서 애들 먹는 것을 보니 내 배가 부르더라.”
“어머니는 안 드셨어요?”
“네 형들이 막 먹다가 엄마는 안 먹느냐고 해서 나는 먹었다고 했지.”
고개를 떨구고 한참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머니! 그때가 언제였어요?”
“너 낳기 전일 꺼야. 세상 엄마들은 다 그렇다. 내가 있었더라면 더 잘 해주었을 것인데. 그때는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이 그것뿐이었다.”
“어머니! 어머니는 장하십니다. 우리 형제들은 어머님을 존경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어머님께서 하실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서 모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이렇게 건전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리 생각하면 고맙고. 요즘 젊은 엄마들은 조금만 힘들면 애들 키우는 것 힘들다고 하는데 글쎄 예전이나 지금이나 엄마 노릇이 힘들기는 마찬가지겠지만 요즘은 참는 것을 못하는 것 같더라.”
그렇게 사랑과 희생으로 평생 살아오신 어머님은 몸져 누워계신다. 옆에 있으면서 제대로 가보지도 못한다. 일 핑계다. 일하다가 잠시 들어가 보면 어떤 때는 주무시고 어떤 때는 일어나 계셔도 일을 핑계대고 금방일어서서 나온다.
자식과 부모의 차이이다. 늘 후회하면서도 진득하게 앉아있지 못한다. 내가 여기 앉아 있다고 어머님이 달라질 것도 아닌데 내가 공인이고 내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을 어머님이 원하실 것이라는 스스로의 마음에 위안을 하면서 또 다시 어머님의 방문을 나선다.
부모와 자식의 온도 차이는 촛불과 태양처럼, 하늘과 땅처럼 크다. 어머님께서 돌아가시면 얼마나 큰 후회를 할는지?
빨간 불 파란 불
세월이 빠르다는 것을 느꼈을 때 이미 60을 향해 숨가쁘게 세월의 엑셀레이터를 밟고 있었다. 세월의 무상함이야 처음 깨닫는 것이 아니지만 인생이 덧없음을 더 진하게 느껴진다. 내 나이라면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했거나 결혼을 시켰을 터이지만 나는 아직 큰아이가 고3이고 둘째는 중딩이니 앞으로 할 일이 너무 많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요즘 아이들이 부모들 나이가 많이 먹었으면 늙었다고 학교에 오는 것도 반대한다는데 우리 아이들 입에서는 그런 말을 들어 본적이 없으니 행운이다.
막내 녀석은 유치원 다닐 때 또래들과 다투면서
“너네 엄마 몇 살이냐?”
“거봐. 우리 엄마는 몇 살이다. 거봐. 우리엄마가 더 어른이지? 까불지마!”
하고 싸웠다니 나이 먹은 것도 한 몫 한 셈이니 다행이다.
내가 살면서 아이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하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너무 늦게 결혼하여 작게는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어 주지 못한다는 것이고, 크게는 아이들을 오래도록 함께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바쁜 관계로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적다는 것이다. 첫 번째야 내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일이나 두 번째는 노력하면 어느 정도 해소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세상에 수많은 인연이 있지만 부모와 자식만큼 귀한 인연이 있을까? 귀한 인연을 알았고 자식이 내 자식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훌륭하게 하나님을 닮은 사람으로 키워 달라고 우리에게 맡겨 주신 걸로 믿고 많은 시간을 할애하려고 애를 쓴다.
사람들과의 만남을 자제하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아무리 힘들고 멀리 있더라도 아이들이 나를 필요로 한다고 하면 어디서든지 달려간다. 학원이 걸어서 십분 거리밖에 안되지만 힘이 들어도 시간이 허락되면 꼭 데리러간다. 아이들이 고3이고 중2니 이들과 나와 함께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와 둘이 걸어오면서 이런 저런 대화를 하면 어느덧 나의 손을 꼭 잡는다.
“아빠. 우리 집 정말 행복하지?”
“왜?"
" 아빠랑 같이 있으면 좋아. 그리고 우리 집 정말 행복해!”
내 마음이 뿌듯하다. 가족이 소중하고 세상에 어떤 인연보다 귀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순간이다.
가족들과 나들이를 할 때면 두 아이는 서로 내 옆에 앉으려고 다투는 모습이 내 마음을 흐뭇하게 한다.
오늘은 어머님 댁으로 나들이 하는 날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서로 내차로 달려간다. 내 옆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다. 어느덧 승자가 갈리고 나면 작은 소란이 잦아들고 차는 큰 도로를 신나게 달려간다.
“아빠. 오늘 재수없다.”
“왜?”
“저기 빨간불이네. 쭉 파란 불이면 좋은데 짜증난다.”
성질 급한 아들 녀석의 말이다.
“애들아. 들어봐라. 아빠는 너희들과 반대인데? 저 불이 파란불이면 이 차가 가다가 중간에 빨간 불로 바뀐텐데 그러면 시간은 더 많이 걸리잖아. 지금 빨간 불이니 이제는 파란 불로 바뀔 희망만 있다. 그런데 파란 불은 언제 빨간 불로 바뀔지 모르기 때문에 초조하고 급하게 빨리 가려다가 사고가 난다.”
“야! 아빠! 파란 불로 바뀌었어요. 재수 좋다.”
“그래. 이렇게 행운이 올 수도 있지만 이런 행운을 기대하지마라. 인생 살면서 이런 행운은 로또 당첨되기보다 더 힘들다. 거의 그런 행운은 없지. 아빠는 파란 불보다 빨간 불을 좋아한다. 너희들이 나중에 크면 이해할지 모르지만 행운이 따르던 불운이 따르던 인생은 살만한 것이란다. 타고난 운명이야 어찌 할 수 없지만 인생은 운명에 도전하여 싸워 볼만한 것이란다. 인생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인내하고 성실하게 살다보면 빨간 불이 파란 불로 바뀌듯이 인생도 바뀌게 되고 행운이 올 수도 있단다. 그 행운은 노력하는 자에게 돌아간다. 로또도 사지 않은 자에게는 당첨되지 않는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냐?”
“네!”
“대답은 잘하는구나!”
입가에 잔잔하게 미소가 가득찬다.
딸과 대화
나는 아침에 시간이 된다면 아이들과 같이 밥을 먹으려고 노력한다. 오늘은 입춘이지만 날씨가 여간 춥지 않다.
“오늘 춥다. 옷 많이 입고 가라. 아빠 운동 다녀오는데 너무 춥더라. 옷 단단히 입고가거라. 오늘은 아빠가 가면서 태워다 줄게.”
“감사해요. 아빠. 어제 중학생이 수학문제 안 풀어진다고 자살 했대.”
“정말이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 큰일이다.”
“집 거실에서 공부하다가 수학이 안 풀어진다고 하더니 방에 들어가서 20분이 넘어도 안 나오길래 엄마가 방을 열고 봤더니 방에서 목을 매 죽어 있더래요. 그 엄마는 어떻게 살까?”
“세상에 별일이 다 많구나! 수학문제가 그 아이에게는 인생의 전부였구나. 세상은 말이야. 맘대로 안 되는 일이 맘대로 되는 일보다 훨씬 많단다. 안 될 때마다 죽는다면 목숨이 백 개라도 모자랄 것이다. 아빠는 말이다. 어리석을지 몰라도 무엇을 시작할 때 성공률 50프로, 실패율 50프로로 잡고 늘 실패할 때를 대비한다. 그렇기 때문에 실패를 한다고 해도 실망하지 않는다. 실패를 대비하기 때문이다. 너 산 꼭 대기에 올라가면 어떻게 해야 되냐?”
“내려와야지요.”
“그렇지. 내려와야지. 정상까지 올라간 사람은 올라 갈 곳이 없으니 내려와야지. 그런데 인간은 내려와야 정상인데 내려오는 것을 싫어한단다. 그래서 욕심을 부리다가 죽게 되기도 하는 거야. 아직 정상까지 가지 못한 사람은 올라가야 할 산이라는 희망이 있으니 좋지 않냐? 아직 못 올라갔다고 해서 초조해하고 불안해하며 슬퍼할 것이 없단다. 돈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고, 없는 사람은 벌기 위한 희망과 그 희망을 이루기 위한 일이 있고, 일등을 한 사람은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고, 꼴찌를 한 사람은 더 올라가기 위한 희망이 있는 거야. 꼴찌가 나쁜 것만도 아니고 일등과 성공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란다. 인생은 살아보면 그게 그거야.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지. 인생의 전부라고 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다 그게 그거야. 인간사 새옹지마라고 하는 말 아냐?”
“알아요. 한문시간에 배웠어요.”
“일희일비하지 말고 늘 평상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좋은 거야. 그렇게 살면 죽을 일이 없지. 늘 희망이 있으니까. 오늘도 파이팅!”
나는 나의 사랑스런 딸과 함께 몸도 마음도 따뜻하게 차려 입고 집을 나섰다.
책 소개
《고목이야기: 정범석의 인생 지혜 산문》
작가 : 정범석
번역 : 침매옥
출판사 : 명인출판사업 유한공사
출판일 : 2017/08/30
작가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 태어났고, 인생의 고난을 통해 지혜를 얻은 경험들이 있으며, 대형 자연 돌조경의 책임자와 수련원의 수석 엔지니어 외에도 세계 각국의 대학교에서 순회 연설을 진행하며 전 세계에 발자취를 남겼다. 한 세월을 통해 인생 각 방면의 성공들을 축적하고, 동시에 유머와 시원함을 갖고 있으며, 연장자들, 성공 인사들, 혹은 젊은이들에 상관없이 모두와 몹시 즐겁게 대화할 수 있는, 젊은이들에게 있어 강직한 어른이다. 본 책은 하나의 결정체와 같은 지혜에 충만한 인생에 관한 대화를 하나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