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濟漫步 by 智囊袋

與RGO 24的記者「智囊袋」一起探索的「經濟漫步」…夢想自己是一本經濟真人書(living book), 記者想要藉此見證透過經濟來動工的 神的攝理歷史。不妨與主一同行走在既美麗又神袐的天國經濟步道上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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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가시

‘가시나무새는 죽기 직전 일생에 단 한 번의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가장 아름다운 소리로 운다. 그 새는 알에서 깨어나 둥지를 떠나는 순간부터 단 한 번의 노래를 부르기 위해 가시나무를 찾아다닌다. 그러다가 가시나무를 발견하면 가장 날카로운 가시에 가슴을 찔려 붉은 피를 흘리며 이 세상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고통을 인식하지 못하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새소리보다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죽어간다.’



호주의 여류작가 콜린 맥컬로우(Colleen McCullough)의 소설 <가시나무새>의 머리말에 나오는 문구다. 이는 과거 아일랜드 원주민이었던 켈트(Celt) 족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의 새인 ‘가시나무새’를 소개한 글인데, 이후 이 비극적인 이야기는 많은 영화, 드라마, 가요, 연극 등의 소재로 쓰여 왔다. 그것은 ‘가시’라는 존재가 갖는 날카로움, 아픔, 고통의 이미지가 수많은 인생사에 접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네 인생사를 담고 있는 성경에도 많은 ‘가시’가 등장한다. 그런데 우리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가시는 단연코 예수님의 ‘가시 면류관’이다. 로마 산헤드린 법정에 선 예수님에게 본디오 빌라도가 사형을 선고하자 로마 군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관저 마당의 가시나무를 꺾어 면류관을 만들어 씌웠다. 바늘처럼 날카롭고 단단한 가시에 찔린 그의 이마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만큼 성경의 가시는 고통과 아픔으로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이탈리아인들은 하나님께서 아벨을 죽인 카인을 달에 보내 가시덤불을 지고 다니게 했다고 믿는다. 달 표면의 검은 자국처럼 보이는 것이 그 덤불이라는 것이다.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런데 예수님을 고통스럽게 했던 그 아픈 가시가 사도 바울에게 박혀 버렸다.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서 사도 바울은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고백을 하고 있다. 이른바 ‘바울의 가시’다. 기독교인들은 이 가시를 바울이 겪었던 여러 가지 육체적 질병이나 고통쯤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사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핍박하던 자였다. 개종 후 제자들과 함께하려 했을 때에도 “그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하였다”라고 할 정도로 기독교 핍박에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얼마나 핍박에 열심이었으면 여러 곳으로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이 다메섹까지 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200마일이 넘는 먼 길을 단숨에 달려갈 정도였다. 그런 그였기에 예수님을 믿게 된 이후 그의 마음속에는 자신의 삶의 행적이 큰 가시와 같이 박혀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눈여겨 볼 점은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 그가 평생의 사명으로 삼은 일이 다름 아닌 ‘복음 전파’였다는 사실이다. 사도행전 20장 24절에 이러한 그의 고백이 잘 나타나 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것도 그냥 사명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과도 맞바꿀 수 있는 일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정명석 목사님께서는 사도 바울이 사명을 목숨같이 여긴 이유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상, 정신, 이념이 임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또한 당시 많은 이들이 순교할 정도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던 시대였기에 이러한 표현이 나왔다고도 하셨다. 그러나 근본은 사도 바울이 영계에서 복음의 가치를 제대로 깨닫고 생명이 면류관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고, 그로 인해 사도가 되고 하늘의 빛나는 거성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목사님은 우리들도 그와 같은 삶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하셨다. 그것은 모든 의문을 해결해주고 소원을 해결해주는 것이 복음이고, 복음으로 인해 창조목적과 휴거를 이루기 때문이다. 또한 복음으로 인해 휴거가 되었기에 휴거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생명처럼 여겨야 신부로서 사도가 되고 주의 몸이 될 수 있다고 하셨다. 복음을 뺏기면 하나님을 뺏기는 것과 같기에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뺏기면 안 된다고 하시며 사명을 귀하게 여기라고 당부하셨다. 그러자면 성삼위와 주를 사랑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주를 낙으로 삼지 않을 경우 무미한 삶이 되고 말기에 어떤 일이 있어도 주와 같이 하자고 하셨다.


예수님을 핍박했던 사도 바울, 아마도 그는 자신의 마음에 박힌 한(恨)의 가시를 복음을 통해 빼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신의 목숨과 맞바꿀 정도의 각오로 12년 동안 수많은 박해를 받아가면서도 10,000마일 가까이 되는 전도여행을 다녔던 바울의 가시는 뽑혀졌을까?



서기 64년 로마의 네로 황제는 로마의 대화재에 대한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씌우며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죽였다. 그 때 베드로와 사도 바울도 순교하였다. 베드로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하여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로마 시민을 십자가에 매다는 것이 불법이었기에 로마의 시민권자였던 사도 바울은 칼에 찔려 죽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새소리보다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죽어간 가시나무새처럼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아름다운 복음을 전하며 그렇게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을 다했던 것이다. 그러나 가시나무새와 달랐던 것은 그의 가슴에 가시나무가 박힌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가슴에 멍울졌던 가시가 뽑혔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그 바울의 가시는 우리 안에도 있다. 과거 복음가수 하덕규는 자신의 영적 깨달음을 한 편의 노래로 토해낸 바 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이 없고...헛된 바램들로 편할 곳이 없고...무성한 가시나무숲 같다며...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간다’고 노래했다. 이 노래 가사와 같이 우리들 마음속에도 수많은 가시가 자리하고 있다. 그 가시가 남들이 알지 못하는 고통과 상처일 수도 있고 주에 대한 미안한 마음일 수도 있다. 또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에게 있어 그 가시는 진리를 찾는 고통일 수도 있다.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을 생명과 같은 사명으로 삼으라는 주의 말씀은 그 모든 가시를 뽑는 비결이 된다. 10월에 열매를 맺는 주엽나무(가시나무)처럼 풍성한 선교의 열매로 그 가시가 뽑혀지길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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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4/10/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