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濟漫步 by 智囊袋

與RGO 24的記者「智囊袋」一起探索的「經濟漫步」…夢想自己是一本經濟真人書(living book), 記者想要藉此見證透過經濟來動工的 神的攝理歷史。不妨與主一同行走在既美麗又神袐的天國經濟步道上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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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환상이 아닌 실체다

19세기 작가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보면, 앨리스가 체셔 고양이를 처음 만났을 때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저, 잠깐 말 좀 묻겠습니다. 여기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까요?”

“그건 어떤 길을 좋아하는지, 네 마음에 달려있지.”

“저는 어느 길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네가 상관없다면, 선택할 필요가 없지 않겠니? 아무 길로나 가렴.”

“제 말은 여기를 빠져 나가고 싶단 말이에요.”

“그건 쉽지. 조금 걷다보면, 틀림없이 ‘여기’는 빠져나가 있지.”


앨리스도 듣다 보니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느 길로 가든 틀림없이 ‘여기’는 빠져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 체셔 고양이는 꼬리부터 사라지기 시작해 마지막에 미소만 남긴 채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이를 보고 엘리스는 “웃지 않는 고양이는 봤지만, 고양이 없는 웃음은 본 적이 없다”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단순히 어린이를 위한 동화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영국의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인 루이스 캐럴이 하나하나의 에피소드에 다양한 의미를 담아 만든 패러디 동화이다. 위 대화도 문제의 본질과는 상관없이 언어적 표현에만 매달리다 나중에 엉뚱한 결론에 이르는 사람들의 모습을 풍자한 장면이다.


그런데 미소만 남긴 채 사라지는 체셔 고양이를 보면서 앨리스가 한 말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웃지 않는 고양이는 봤지만, 고양이 없는 웃음은 본 적이 없다.”


이 말에는 신의 존재에 대한 데카르트와 칸트의 의견 차이를 함축적으로 녹여내며, 실체가 없는 속성은 무의미하다는 철학적 담론을 담고 있다.


데카르트와 칸트는 동시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두 사람이 직접 논쟁한 것은 아니지만, 데카르트는 전능한 신이 존재한다면 모든 속성을 다 갖추어야 하는데, 그런 속성 중의 하나는 바로 ‘존재한다’는 점이라며, 신은 그 속성상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칸트는 속성이라는 것은 존재하고 난 이후에 정의되는 것이므로 존재는 속성의 일부가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즉, 데카르트의 논리는 신의 존재에 관한 증명이 아니라 신이 존재한다는 주관적 신념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결국 “웃지 않는 고양이는 봤지만, 고양이 없는 웃음은 본 적이 없다.”라는 엘리스의 말은 칸트의 이러한 생각을 대변한 셈이다.


개인적으로 모태신앙인 한 친구와 대화하던 중 부활과 휴거, 재림에 대해 의견충돌을 빚은 적이 있었다. 기성 신앙을 해온 독실한 그 친구는 모든 것을 육적으로 해석했다. 예수님이 앞으로 육으로 재림하면 이미 죽었던 육신이 다시 부활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나는 이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며 상식적인 반박에 딱히 할 말이 없었는지, 마지막으로 그 친구는 “하나님은 믿기 불가능한 것을 행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다”라는 주장을 펼쳤다.


그의 마지막 말이 마치 하나님의 실체를 규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속성을 먼저 이야기하는 데카르트와 유사해보였다. 즉,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시고, 불가능한 것까지 행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속성을 먼저 말하면서 하나님의 존재를 정의하는 데카르트적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신의 존재에 관한 증명이 아니라 신이 존재한다는 주관적 신념에 불과할 뿐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데 정명석 목사님은 하나님의 실체를 항상 이야기하신다. 구체적으로 인간과 같이 눈, 코, 입, 귀를 모두 갖춘 정확한 모습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세상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며 그의 실체를 증거하신다. 그리고 그런 실체를 전제로 하나님의 특성과 속성을 말씀하신다.


정명석 목사님이 이렇게 하나님의 실체를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은 기성 신앙인처럼 막연한 생각과 환상으로 하나님을 배운 것이 아니라, 영적인 실체로부터 직접 말씀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성자는 예수님을 쓰시고 직접 실체로 정명석 목사님을 가르치셨다. “나는 환상이 아니다. 나는 실체다. 나는 영체의 실체니라. 마치 육이 직접 나타난 것처럼 영체가 직접 나타난 것이다. 깨달아라. 지금 내가 이 땅에 왔노라. 지금 다시 와서 너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실체가 느껴지고 가슴에 큰 울림이 남는다.


기독교 초기 교부였던 테르툴리아누스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믿는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4세기의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신은 꼬치꼬치 캐묻는 자들을 위해 지옥을 마련했다’며 호기심을 죄악으로 연결시켰다. 칼뱅은 우리가 진리를 알아내려 해도 불가능하고 그러한 시도를 하는 것은 신에게 불손한 것이라고 했다. 나의 친구는 “하나님은 믿기 불가능한 것을 행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다”라는 개똥철학을 펼쳤다. 그러면서 자신의 말씀이 진리라고 말하고 있다. 신앙의 도그마가 어쩜 이렇게 이어질 수 있는가?


과학자 막스 플랑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반대하는 사람을 설득시키면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자가 죽어 사라지고 난 뒤에 새로운 세대가 그 진리에 익숙해질 때야 비로소 완성된다.” 비록 과학의 속성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지만, 그만큼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 말이다. 현 시대에 실체적 진리를 깨달고 받아들인 섭리인들이 정말로 위대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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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6/4/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