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濟漫步 by 智囊袋

與RGO 24的記者「智囊袋」一起探索的「經濟漫步」…夢想自己是一本經濟真人書(living book), 記者想要藉此見證透過經濟來動工的 神的攝理歷史。不妨與主一同行走在既美麗又神袐的天國經濟步道上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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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삶 소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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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반 강원도에서 한 부부가 산부인과 의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좀 특이했다.


부부가 임신 기간 중 양수검사까지 받고 아이가 건강하다는 의사의 말을 믿고 출산을 했지만, 그들의 아이는 다운증후군이었다. 이에 아이를 양육할 꿈에 들떴던 부부는 좌절하고 말았다. 도저히 아이를 키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부부는 문득 아이가 건강하다고 말해준 산부인과 의사에게 책임을 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부는 의사의 실수 때문에 자신들이 장애아를 출산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겪은 정신적 충격과 양육비의 상당액을 배상하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사건에는 또 다른 원고가 있었다. 바로 다운증후군을 가진 아이 자신이었다. 물론 부모가 법정 대리인으로서 아이의 이름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형식을 취하긴 했다. 아이의 손해배상 청구 이유는 “당신의 실수로 내가 태어났으니 그 손해를 배상하시오”라는 것이었다.


사실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일터에서 다쳐 장애인이 된 사람들이 사고에 대한 책임과 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은 매우 흔한 일이다. 그러나 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이 손해라고 주장하는 것은 낯익은 일이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유형의 소송이 한국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미국, 독일, 프랑스 등 여러 나라에서 장애아를 출산한 부부가 산부인과 의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되곤 했다. 법학자들은 이런 유형의 소송을 ‘잘못된 삶(Wrongful life) 소송’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이러한 ‘잘못된 삶 소송’에서 우리 대법원은 어떻게 판결했을까? 대법원의 판결은 다음과 같다.


원고는 자신이 출생하지 않았어야 함에도 장애를 가지고 출생한 것이 손해라는 점도 이 사건 청구 원인 사실로 삼고 있으나,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그 가치의 무한함(헌법 제10조)에 비추어볼 때, 어떠한 인간 또는 인간이 되려고 하는 존재가 타인에 대하여 자신의 출생을 막아줄 것을 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보기 어렵고, 장애를 갖고 출생한 것 자체를 인공임신중절로 출생하지 않은 것과 비교해서 법률적으로 손해라고 단정할 수도 없으며, 그로 인하여 치료비 등 여러 가지 비용이 정상인에 비하여 더 소요된다고 하더라도 그 장애 자체가 의사나 다른 누구의 과실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 이상 이를 선천적으로 장애를 지닌 채 태어난 아이 자신이 청구할 수 있는 손해라고 할 수는 없다.


결국 잘못된 소송을 제기한 원고의 손해배상 청구를 기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를 떠나서 이러한 소송이 제기된 원인을 돌아보면, 장애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과 차별, 배제에 그 원인이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게 된다. 장애인을 차별하고 손가락질하는 사회적 분위기속에서 강원도의 그 부부는 자신의 아이를 정상적으로 키울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사실 최근에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가 많이 완화되긴 했다. 즉, 장애인, 소수 인종 등을 대놓고 차별하고 배제하는 일은 많이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사람들에게 주류 집단에 동화되기를 요구하는 이른바 ‘커버링(covering)’ 압력은 존재하고 있다. 커버링은 쉽게 말해, 자신이 가진 비주류적인 특성을 티 내지 말라는 요구다.


비록 장애인의 삶을 예로 들어 장애인을 바라보는 사회의 모습을 살짝 비판해보긴 했지만, 우리의 삶에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게 된다. 특히 조직 생활을 하는 경우 이와 유사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일을 못하거나 재능이 없다고 판단하고 그 사람을 일에서 배제시키거나 왕따를 시키는 것이 좋은 예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하시지 않으신다. 정명석 목사님은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재능대로 일을 맡긴다고 하시면서, 아무리 보잘 것 없는 몸의 지체라도 자신만의 역할이 있다는 비유를 들으셨다. 만일 그 지체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몸은 즉각 불편을 느끼게 되고 신체는 밸런스를 잃게 된다.


팔이나 다리를 다쳐 한 달만 깁스를 하고 있어 보라. 얼마나 불편한지 모른다. 다친 손과 발이 해야 할 역할을 다른 손과 발이 해야 하고 몸은 즉각 균형을 잃어버린다. 일시적으로 다친 팔도 이러한데, 편견과 어줍은 평가로 인해 어떤 사람에 대해 자신의 존재가 ‘잘못’이나 ‘손해’가 아닌지 되물어야 하는 입장에 서게 만든다면, 그 조직은 균형을 잃어버리고 만다.


더 나아가 그렇게 자신의 존재가 손해인지를 되물어야 하는 이들은 하나님께 ‘잘못된 삶 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형식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라면 하나님께서는 이에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다.


이미 그 응답은 정명석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나온 듯하다. “하나님은 재능대로 일을 맡기신다. 하나님은 지체별로 일을 맡기신다. 모든 지체는 저마다의 역할이 있다.”


그러니 장애로 태어난 것이 더 이상 원망스럽지 않아 소송을 제기할 필요가 없는 사회마냥, 한 사람의 역할이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그것을 인정해주는 조직, 비록 그 역할이 눈에 띄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시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는 문화가 되기를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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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9/9/2019